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윤한덕 의사 (=오직 국가와 국민만 생각한 독립운동가)

10줄 미만 2024. 8. 5. 05:34

 

윤한덕은 1968년 해남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누나만 넷)

 

해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윤한덕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광주로 이사하게 된다

 

그리고 윤한덕은 명문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릴때부터 기술에 관심(라디오 분해/조립)이 많았고,

성적이 좋아 서울대 공과대학에 가길 원했었지만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고,

누나들도 대학에 다니고 있던지라 

'집안에 의사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 뜻을 따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에 진학하게 된다.


그러나 본인이 진학을 원하지도 않았고,

의대 공부에 큰 뜻이 없었던 윤한덕은 휴학을 하거나,

의대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윤한덕은 상당히 호방한 성격으로

신입생 OT 때 선배들이 오리걸음 기합을 주자

왜 이걸 해야하냐며 들고 일어난 적도 있었다.

 

어찌저찌 본과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전남대병원 응급실 인턴으로 있었던 윤한덕은 

막을수 있었지만 그러하지 못했던

수많은 죽음을 보게 되었다고 훗날 말했다.

 

응급의료 체계가 잘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일단 큰 병원인 전남대병원으로 환자를 보냈었고,

이들을 다시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 루틴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당시 차에 깔려 응급실에 실려온 어린 아이를

'전문의의 미비'로 살리지 못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는 윤한덕이 응급의료 체계를 갖추고자 마음먹은

가장 큰 계기였다.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가 계기가 되어

1995년에 응급의학과 전문의 선발이 시작되었고,

1998년 군 복무를 마친 윤한덕은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들어가게 된다.

 

2002년에는 응급의료기획팀장에 선임되어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는 컴퓨터로 관리되는 의료시스템을 만들고자 하였고,

직접 컴퓨터를 만져가며 체계를 짰다.


그렇게 해서 2003년,

전국의 응급의료기관으로부터 전송되는 진료 정보를

실시간 수집하는 국가응급의료진료망(NEDIS)이 시작된다.

 

응급의료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없었을 때,

환자 동선이나 진료 데이터를 분석하는

국가응급진료정보망을 직접 기획하고 개발, 구축한 것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전국 실시간 응급의료 정보가 통합되고,

중앙응급의료센터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119가 이를 활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또한 윤한덕은 2011년부터 

응급의료 전용헬기(일명 '닥터헬기')사업에 매진한다.


이런 업적을 쌓은 그는 2012년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 의료센터장에 취임했다.

 

질병관리본부가  2015년 5월 20일에 

메르스 1번 환자를 국립중앙의료원에 전원했을 때, 

윤한덕은 메르스 사태를 총괄 지휘했다


세균을 차단할 수 있는 음압 병상과 구급차를 구상했고,
그 결과 추가 감염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국립중앙의료원이 메르스 중앙거점 의료기관으로 지정된 후

총 67명의 환자를 단 한 명의 추가 감염 없이 진료했다.

 

전국 17개 권역외상센터를 설치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응급의료종사자 전문화 교육에 앞장섰다.

권역외상센터 설치와 닥터헬기 도입으로 인해 사망률은

'15년(30.5%), '17년 (19.9%), '19년(15.7%)를 기록했다.

 

윤한덕의 꿈이었던

'예방 가능한 사망'의 감소가 지표로써 실천된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챙기지 못했다.

 

윤한덕은 만 51세(2019년) 설 연휴 기간이던 2월 4일

자신의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됐다.

업무상 과로사로 판명된 고인의 책상 위에는

지역외상체계TF의 거버넌스 조직도가 놓여 있었다.

 

 

 

병원 하나만으로는 빠른 응급의료체계를 만들 수 없기에

윤 센터장은 의료기관과 소방기관, 지자체가 협업하는

완벽한 '지역화 응급의료체계'를 꿈꿨다.


응급의료뿐만 아니라 재난응급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응급의료체계 발전을 고민하느라 쉴 시간이 거의 없었다.

주말 밤에 퇴근해 월요일 새벽에 출근하는 때가 잦았다.

 

그는 숨지기 전 일주일간 129시간 30분을 일했고,

3달 동안 평균 118시간 42분을 일했다.

만성 과로 인정 기준은 그 절반 정도인 주 60시간이다.

 

그의 또 다른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본인이 자문한 어린이용 만화책과 닥터헬기 모형이 있었다.

 



2008년 겨울, 이국종 교수가 윤 센터장을 찾아갔을 때 

윤한덕 센터장은 이국종 교수에게 

"지금 이국종 선생이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동안에 

갑자기 중증외상환자가 오면 누가 수술합니까"라고 물었다.


이국종 교수는

"그가 나를 보자마자 던진 질문의 함의는 선명했다."

"외상 외과를 한다는 놈이 밖에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것은

환자를 팽개쳐놓고 와 있다는 말 아니냐?

그게 아니면 환자는 보지도 않으면서 보는 것처럼 말하고

무슨 정책 사업이라도 하나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

 

"그는 내내 냉소적이었으며 나를 조목조목 비꼬았다. 

그럼에도 나는 신기하게도 그에게서 진정성을 느꼈다."

"08년부터 09년까지 외상센터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그 시기에 그를 종종 보았다"

"윤한덕은 수많은 장애 요소에도 평정심을 잘 유지했고,

출세에는 무심한 채 응급의료 업무만을 보고 걸어왔다"

 


응급의료 발전을 위해 하루 19시간을 일하고

집에 머문 시간은 일주일에 고작 3시간 이었으며,

1년 내내 간이침대에서 자며 25년간 응급환자를 돌봤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뒤에서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윤한덕은 자신이 했던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일만 묵묵히 했을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환자가 돈이 있든 없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신속히 적절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기만을 바랐다.

환자를 위한 생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윤한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국종 교수의 책 '골든아워'에서

[윤한덕]이라는 챕터를 통해 약간 알려졌을 뿐이다.

 

이국종 교수는 윤한덕을 응급의료의 책임자이고,

일신의 영달을 마다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윤한덕은 자신을 과대 포장한 것이라며 쑥스러워 했다.

자신의 존재를 누가 알아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환자를 위한 의사로서의 사명이 더 중요했다.


정작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 형제들도

윤한덕이 응급의료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을 몰랐다.

사후, 언론을 통해 그가 이룬 많은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국종 교수는 윤한덕의 추도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 전체를 들어 올려 거꾸로 흔들어 털어 보아도,

선생님과 같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두려움 없이 헤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응급의료기관평가, 응급진료정보망 구축, 전용 헬기 도입 등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선도적 임무를 수행하던 진정한 리더'

- 대한응급의학회 성명 -


'병원에서 실수하면 몇 명이 죽지만

우리가 실수하면 수천명이 죽을 수 있다고 하시던

센터장님의 말씀과 웃음이 그립다.'

- 윤순영 재난응급의료 상황실장 -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던 그가 가장 바라던 것은

응급실 환자들이 기다리지 않고 치료받게 하는 것이었다'

-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허탁 -

 

2019년 4월 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 되었고, 

정부는 응급의료정책 발전에 힘써온 그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윤한덕 박사님이

하늘에서 너희 의새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실까?

 

의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시작됐다.

위 영상의 베스트 댓글 권력에 굴복했다기 보다는 법대로 처리했다가 맞다 사직처리됐으면 입대영장 신속히 진행해라.안그래도 입대자 부족해서 문제라는데 친구 아버지가 전공의들 파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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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의사가 의사 집단을 비판한 글 (feat. 방관자)

출처 : 블라인드 현 의정갈등을 세대 갈등으로 분석한 글과정책들에 관한 글들도 많지만,보다 직접적으로 현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전공의들의 특성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함. 물론 개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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