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한국인 (국뽕주의)

힘든 환경에서도 어렸을때 인정받으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10줄 미만 2024. 6. 18. 04:42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조현병이 발병하셨고 아빠는 집을 나갔습니다.


엄마의 병은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청 심해져서 제 머리채를 잡고 벽에 쾅쾅 찧고,

발로 온몸을 밟고, 마늘 찧는 절구로 머리를 때리고..

거의 기절 직전까지 심하게 때렸어요.

칼을 들고 같이 죽자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 때리고 나면

눈물 흘리며 미안하다고 안아주셨습니다.


엄마가 환청 때문에 일 나가도 쫒겨 오자 

집세를 낼 수 없어 전기,수도, 가스 다 끊겼고,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으며 살았습니다. 

 

엄마는 저와 동생을 데리고 

대형마트에서 도둑질을 시켰고, 

목숨은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온몸은 항상 쑤시고 아팠고, 엄마가 너무 무서웠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친가/외가 모두 저희와 엄마를 외면했어요. 


그 2년동안의 기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근데 그보다 더 심한 트라우마는 

엄마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당하셨을 때 

제 눈앞에서 짐승 취급 받으며 끌려가는 모습이 

가장 충격적이었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슬픔을 느꼈습니다.

 

병세가 심하셨지만

그래도 정신이 좀 온전하신 날엔

예쁜딸, 멋진 아들이라고 해주며

저희를 누구보다 사랑해 주시는 엄마셨습니다.

 

그런 엄마를 세상은 괴물 취급하는 걸 보며

많은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이 미치도록 싫었습니다. 


아픈 엄마와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저희를 피해 도망 다닌 아빠라는 인간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조현병은 초기 치료가 중요 하다는데 

아빠가 엄마를 조금이라도 케어해 줬으면 

이렇게 까지 병세가 심해지셨을까? 싶고, 

회피하고 외면하기만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외가 친척들이 

진짜 꼴보기 싫습니다.


친가 식구들은 엄마와 저희를 무시하는 발언을 해서 

정말 상처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한번씩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을 보면 

그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공감과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하기엔 

전 제 자신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저는 배운 적 없는데도 

운동과 글쓰기에 매번 상을  탔었고,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서 

친구들이 저에게 물어보곤 했습니다. 

최악의 환경 이였지만 

제가 가진 재능으로 인정을 받다 보니 

자존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저를 왕따 시키고 괴롭히는 애들 때문에 

학교를 안 나가는 날도 많았었고, 

건들더라도 무섭게 받아치고 싸움을 잘하니 

더 이상 건들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엄마를 무시하는 친척들을 보며 

나중에 내가 꼭 성공해서 

코를 짓밟아 주겠다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제 마음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였고, 

항상 날이 서있는 채로 살았습니다. 

살다 보니 나약한 약자로 살 바엔 

성질 더러운 인간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목사님 도움으로 보육원에서 잠깐 살다가 

친할머니가 저와 동생을 데리러 오셔서, 

제 학창 시절은 할아버지가 폐지를 주운 돈으로 

네 식구가 먹고 살았습니다. 


초등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해

중학교 땐 친구들이 이차방정식을 배울때,

저는 방과 후 까지 남아

구구단과 사칙연산을 배우며 진도를 겨우 따라 갔고,

마음이 항상 슬픔에 가득차 있고 어두웠던 저는

게임 중독자였습니다.

 

그럼에도 학창 시절, 몇몇의 좋은 선생님들이

물질적인 지원과 정서적인 응원을 해주셔서

위로를 많이 받았었고,

종교에 의지 하면서 외로운 마음을 달랬으며,

고전 서적과 자기 개발 서적을 읽으며

통찰력을 길렀습니다. 


21살에 조부모님으로 부터 독립을 하였고,

첫 회사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좋은 동료들을 만나서,

사람 눈도 못쳐다 보던 제가

점차 사회공포증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살아보니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인생에 큰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엄마와 다시 살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엄마는 정신병원에서 살 바엔

밖에서 하루,이틀 살다 죽는 것이 낫다며

매일같이 저와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마음 약했던 저는 엄마를 외면할 수 가 없었습니다.

퇴원을 시켜 드리면 재발 하셔서

매일 환청과 싸우시며 혼잣말 하시고

소리를 마구 질러 대셨습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진짜 미쳐요.

이웃집들은 모두 이사를 갔고,

경찰도 와서 보고 도망갔습니다.

 

엄마는 병세가 매우 심한 편이 셨어서,

컨트롤 하기가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습니다.

또한 엄마를 보면 마음이 너무 속상하여

그 상황을 회피할 때가 많았고,

병원 입/퇴원을 10번도 넘게 반복 시키며

매우 불안정하게 살았습니다. 


엄마를 사랑하였지만,

마음엔 항상 아주 큰 돌이 얹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미치도록 힘들어서 엄마가 없었음 좋겠다

생각할 때도 많았지만,

엄마 곁엔 저와 동생밖에 없었기에

엄마를 놓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렇게 불안정 하게 20대를 살아오다

2년 전 엄마를 보내드리고,

30대 초반인 지금에서야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 했습니다.

 

다행히 좋은 남편 만나

점차 안정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있고,

제 자신을 가엾게 여기며

엄마 몫까지 더 행복 하려고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안 좋은 생각도 수없이 들었지만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자해한 적도 없고, 

강하게 마음 먹으며 이 모든걸 견뎌내고, 

성실히 살아온 제 자신이 대견스럽습니다. 

 

흙수저도 아닌 마이너스 수저에서 시작하니 

저에겐 앞으로 올라갈 계단만 있더라구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한걸음 씩 올라가는 재미로 살아왔습니다. 

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살았고,  

평범한 사람만큼 올라왔다는 성취감이 듭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저는 

대인관계 기피증이 남아 있고, 

사소한 걸로도 분조장처럼 화낼 때가 있었으며 

애정결핍이 심했고, 자주 불안정 했습니다. 

심리치료가 도움이 되었지만, 

그런 저에게 끝없는 믿음을 주며 

치료 되기를 기다려 준 남편 덕에 

다시 사람을 믿게 되었고, 

안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아팠던 트라우마 이겨내며

남은 여생 행복하게 살거에요. 

누가 뭐라하든 

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지 같든 어떻든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겁니다.  

 

인생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겠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 좋은 날도 옵니다. 

좋은 사람들과 남편을 만난 것이 

제 인생에 큰 행운이기도 하지만, 

그 행운을 잡기 위해 오랜시간 인내하고 

노력해 왔기에 저는 

행복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추가) 

사실은, 지금도 한번씩 엄마 꿈을 꾸고나면 

걷잡을 수 없는 큰 슬픔에 빠져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깊은 절망감을 느낍니다. 

 

결혼 3년차인데 

남편과 함께하는 일상이 정말 행복하지만, 

고통스러운 과거가 한번씩 저를 괴롭히고, 

그 고통에 잠식되어 많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이겨내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비참하게 잃었거나,

오랜 기간 끔찍한 고통을 당해온 사람의 상처는

굉장히 오래, 아니 평생 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점점 옅어지길 희망합니다.

 

인생은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날들도 있기에

살아가게 되는것 같습니다.

 

아픈 트라우마 가지신 모든 분들이

행복한 날이 더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글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채수근 해병 엄마의 글

고 채수근 엄마입니다. 저희 아들 장례기간 중국민 여러분들께서 함께 위로해 주시고,윤석열 대통령님과 국가에서도수근이에 대한 최대한 예우를 해주신 점에 대해서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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