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말했어야지"라고 말하기 전에

10줄 미만 2026. 10. 8. 23:01

출처 : 인터넷 떠도는 글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해,
아이는 하교 할 때마다 학교 옆 문구점에 들렀다.

물건 앞에 오래 머물다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값도 묻지 않았고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아이가 갖고 싶은 것을 말할 때는
마음이 이미 다 정해진 뒤였다.
오래 고민하고도 그 마음이 남아 있을 때
비로소 한 번 말했다.

그러므로 아이의 한 번은
첫마디가 아니라 마지막 말이었다.
닌텐도 게임팩을 갖고 싶다고 했던 날도 그랬다.
아이는 한 번 말했고, 다시 꺼내지 않았다.

작은 아이는 달랐다.
야구 글러브를 사달라며 아빠를 졸졸 따라다녔다.
결국 남편은 아이가 콕 찍어 원했던 글러브를 사주었다.

그날 큰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나는 아이를 한참 안아준 뒤 말했다.

"가족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어.
상대가 알아주겠거니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말해야 해.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아."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더는 갖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에게 게임팩을 사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나
두 아이와 <백일홍 이야기>를 읽었다.

이무기와 싸우러 떠나는 남편은 아내에게 약속했다.

하얀 돛을 달고 돌아오면 자신이 살이 있는 것이고,
붉은 돛을 달고 돌아오면 죽은 것으로 알라고.

백일째 되는 날, 배 한 척이 마을로 돌아왔다.

돛에는 이무기의 피가 묻어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아내가 묻힌 자리에 꽃이 피었고,
사람들은 그 꽃을 백일홍이라 불렀다.


책을 덮자 큰 아이가 말했다.

"아내도 남편도 모두 성급했어. 둘 다 잘못한 것 같아."

"어떤 면이?"

"아내는 배가 마을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인했으면 남편이 살아 있는 걸 알았을거야.
백 일이나 기다렸잖아. 돛이 전부 빨간 것도 아니고
얼룩이 생긴건데, 남편이 죽었다고 미리 생각한 거잖아."

"맞아.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만났을텐데.
짐작하면 안되는데"
작은 아이가 진지하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큰 아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남편도 잘못했어.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을 돛 하나로만 알려주려고 했잖아.
돛이 그렇게 중요했으면
마을에 오기 전에 한 번 확인했어야지."

한번의 신호로 모든 뜻이 전해질거라 믿은 것은
남편과 아내 모두였다.
한 사람은 얼룩진 돛만 보고 결말을 짐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오래전에 정한 약속이
끝까지 정확히 작동하리라 믿었다.

문득 닌텐도 게임팩 일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가 아빠의 마음을 넘겨짚었고,
우리는 아이의 한 번을 가볍게 흘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이는 두번, 세번 조르는 법이 없었다.
대신 오래 참다가 가끔 한꺼번에 울었다.

"왜 졸라야만 사주는 건데?"

"나는 엄마 아빠가 돈이 없을까봐 더 말하지 못한거야.
말할줄 몰라서가 아니라 안한 거라고"

나는 그동안 아이가 거절당할까봐 입을 닫았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를 걱정해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 앞에서 돈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내게는 물건을 아껴 쓰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반복해서 도착한 정보였다.

문구점에서 값조차 묻지 않던 아이.
나는 그것을 조심성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오래전부터 자기 마음보다
내 주머니를 먼저 헤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넘겨짚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계속 올려보낸 신호를 읽고 있었다.
배를 돌린 것은 아이였지만, 돛을 붉게 만든 사람은 나였다.

말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흔히 같은 충고가 돌아온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했어야 한다고,
오해했다면 물었어야 한다고,
상대가 알아주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침묵보다 먼저 도착한 말들이 있을 수 있다.

반복되는 한숨, 거절의 표정과 말,
말해도 소용없으리라는 기색.
그런 것들이 쌓이면 사람은 입을 열기 전에
상대의 대답부터 짐작한다.

나도 한번 말했으니 내 뜻은 전했다고 믿은 적이 많았다.

설명했는데 이해하지 못한 것은 상대의 몫이라고 여겼고,
대답이 없으면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돛을 올린 사람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 신호가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는 일.
배가 닿을 때까지.